가정을 보는 3개의 시선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사진은 무엇인가를 기념하고 있다. 아니 기념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이미지들이란 결국 시간의 지배와 시간의 힘 앞에서 소멸하고 죽어가는 것들을 되살리고 기념하기 위해 제작되었음을 상기해보라. 인간이야말로 시간/죽음을 극복하고 넘어서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했던 존재들이다. 사진의 발명은 비로소 그 시간을 정복하고 멈추어버리게 함으로써 죽음을 유예시킨 장치로 이해되었다. 물론 시간은 다만 시간의 정지, 지체, 지연을 창백하게 보여줄 뿐이고 결국 그 특정한 순간의 시간을 다만 기념할 뿐이다. 시간을 재현하는 사진은 오로지 어떤 시간 속에서만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다. 어쨌든 인간은 사진의 발명을 통해 한 순간, 찰나를 기록하고 정지시킴으로써 시간을 인간의 시선 아래 굴복시켰다고 믿고 싶어했다. 결국 사진은 시간의 현존성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진은 그 어떠한 것을 재현하기 이전에 이미, 벌써 앞질러서 시간을 보여준다. 우리가 지나간 사진에서 바라보는 것, 눈에 들어와 박히는 것은 결국 지금은 부재하지만 한때 그곳에 그렇게 있었고 분명 저런 모습을 하고 살아있었음을 증거해주는 모습, 상이다. 인간은 모든 시간을 안타깝게 추억화하고 재현하고 보존시키고 싶어한다. 그런 예증은 수많은 기념사진들이 증거한다. 기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사진의 종류 또한 수많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족 앨범이야말로 기념사진의 목록이자 한 가족의 시각적 도서관이다. 그것은 특정 집안, 가문, 가족의 삶의 이력이 촘촘히 직조되어 있는가 하면 듬성 듬성 모자이크되어 있다. 그것은 오로지 그 가족성원만의, 그들만의 삶의 모습이고 초상이자 지난 시간의 기억이고 추억이다. 이 가족의 초상사진이야말로 소중한 기념물이고 사진을 일반인들이 선호하게 하는 본능적인 욕망을 가장 실질적으로 충족시켜준다. 사실 예전에 초상이란 귀하고 접하기 어려운 그림으로 인식되었고 그것은 지배계급들만이 독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초상화란 한 시대의 왕족이나 지배계급들의 전유물이었다. 사진은 비로소 초상화의 민주화를 결정적으로 이룬 것이다. 기념사진의 대표적인 것은 단연 가족사진이다. 가족사진이란 무엇보다도 ‘융합의 수단과 인덱스로서의 사진’(피에르 부르디외)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가족 성원간의 하나의 이벤트를 기념함으로써 가족의 성원임을 증명하고 강조한다. 대단한 연대의식을 강조하는 것이 모든 초상사진의 기능이겠지만 이 가족사진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끈끈한 핏줄의 혈연성을 증명한다.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고 엇비슷한 골상과 생김새로 한 자리에 화목하게 둘러서있는 그 사진은 어찌 보면 완강한 가족주의, 혈연주의의 강고한 성역, 울타리를 느끼게 한다. 그 영역에 타인들은 들어갈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대단한 배타주의의 내음을 진동시킨다. 가족을 이루고 또 누군가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가족을 꿈꾸는 인간의 이 무서운 군집생활의 본능, 가족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본원적이자 항구적인 욕망임을 그 가족사진은 보여준다. 가족사진의 등장은 그만큼 가족이란 제도가 중요시해지고 그것에 의한 사회적 작동의 기능이 요구되던 시기와 맞물려있다. 당연히 가족 형태의 변화가 가족 사진의 구도와 스타일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가족이란 제도를 둘러싼 담론에 따라 가족 사진은 변하고 변질된다. 따라서 가족사진은 단순한 가족의 재현이 아니라 가족을 둘러싼 의미의 이미지화이다. 그것은 그만큼 사회학적 자료로서 얘기되고 분석의 틀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진의 도입 이래 가장 많이 찍히는 사진은 당연히 가족사진이다. 그것이 보다 대형화되고 장식화되면서 다양한 종류와 수준으로 인해 차등화된 것은 우리의 경우, 80년대 들어와 경제적 성장과 자본주의의 소비문화가 어느 정도 우리 삶을 지배했을 때 가능했다. 가족사진을 집안에 전시하는 것은 사진이 갖고 있는 확인, 인증의 기능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이는 우리의 주택문화의 질적 변화에 기인한다. 대개가 아파트 거실문화권에서 삶을 영위하게 되면서부터 커다란 벽면과 마주치고 그 벽면을 장식할 이미지, 사진을 원하게 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바로 가족사진, 결혼사진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자신들의 가족의 정서적, 혈연적 유대감과 행복과 삶의 수준을 증거하고 있다고 믿게 한다. 동시에 그 가족사진은 그렇기 때문에 결국 한 사회가 요구하고 인정하는 행복한 가정, 모범적이고 누구나 원하는 수준의 가정을 이루고 있다는 형식, 틀을 내재화한다. 활짝 웃으며 편안하게 둘러앉아 있는 그 모습은 턱없는 만족감과 성취감, 인생의 성공담을 은연중 보는이에게 강요한다. 따라서 가족사진 안에 들어가 있는 가족 성원들은 각자의 포즈와 미소, 그에 따른 역할 분담이 연출되고 상투화된다. 여기서 그 피사체들은 가족사진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떤 상을 요구하는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이렇듯 수많은 각각의 가족사진은 한 가정의 거실 벽면과 화장대위에, 여기 저기 자그마한 액자 혹은 앨범의 갈피 속에 무수히 저장되어 수시로 출몰한다. 그것이 여태껏 우리가 신물나게 보아온 가족사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족사진에서 제외시키고 타자화시킨, 은닉된 부분을 건드린 사진전시가 ‘리빙룸’이란 제목으로 열렸다. (보다갤러리,9.15-9.28)이 전시는 기존의 익히 보아 오던 가족구성원의 결속과 이를 기념하기 위한 목적의 가족사진이 아닌 구체적인 일상의 삶의 진행되고 벌어지는 공간, 즉 ‘가정’이란 공간과 그 공간에서의 구체적인 삶을 겨냥하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가족사진의 이데올로기와 상투성을 문제시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른바 여성들의 시선, 특히 주부로서의 시선을 통해 오늘날 한국 가정의 내부를 관찰한 것이다. 가정의 내부란 쉽게 타인에게 드러나지 않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다. 이 세 명의 여성들은 모두 사진을 전공하고 가정을 이루며 가사일과 사진 찍는 일을 병행하는 이른바 주부작가들이다. 살림살이적 서사성, 모든 하찮은 것들을 되살려내는 능력, 자잘한 일상에 주목하는 힘들이 어쩌면 이들의 공유성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안목과 시선이 ‘리빙룸’전체를 일단 통과하고 있다고 보여졌다. 이들의 작업은 그래서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의 공간에 주목한 결과로 비쳐진다. 남성들은 이런식으로 ‘가정’을 찍을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의 시선에 포착된 가정은 이선민의 경우, 끝없는 가사노동과 아이의 양육으로 점철되는 노동과 권태, 반복과 상투형의 삶이다. 그리고 그 삶은 지루하게 이어지고 그 지루한 반복은 가정이 결코 행복한 보금자리라거나 안락과 평화, 사랑과 즐거움만이 넘실대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동시에 가정이 지속되고 유지되기 위해 가혹하게 요구되는 여성의 힘든 노동과 가사일을 불쑥 보여준다. 방문을 열고 얼떨결에 들여다본 시선의 처리는 우리를 그 가정의 한 가운데로 느닷없이 초대해놓는다. 불쑥 불청객의 자리에서 들여다본 그 가정의 내부는 대한민국의 모든 가정에서 벌어지는, 있음직한 풍경이다. 그 방안 곳곳에 놓여지고 부착된 자잘한 소도구들은 우리의 가정이 얼마나 획일적이며 통속적인가 심지어는 괴이하고 어색하며 낯선지를 상기시켜주면서 아울러 진부한 인생의 드라마를 지겹게 들여다보아야 하는 모종의 참담함 같은 것을 심어주는 편이다. 그러나 그 장면은 지나치게 일상적이고 익숙한 편이라 가정이란 공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측면의 부각이 다소 맥없이 잡혀지고 있다는 아쉬움을 준다. 김옥선의 사진은 기존의 가족사진의 기념비성을 추종하면서 기묘한 균열을 은연중 보여준다. 카메라를 의식하고 서있거나 앉아있는 이 가족 구성원들은 단순히 그들만의 육체의 전면성을 보여주기 보다는 어느 특정한 장소, 즉 그들만의 사적이고 비밀스럽기까지 한 일상이 전개되는 그 장소에 그렇게 위치해있음을 강조해서 보여준다. 그렇게 해서 배경과 인물들은 분리되지 않고 그 공간, 풍경(인테리어)을 통해 이들의 삶의 문화, 지적 수준, 교양의 척도, 자신들만의 신분관리 등을 조심스럽게 읽게한다. 가정이란 공간과 그 공간을 자배하는 인테리어가 그곳에 사는 이들의 모습, 의상, 몸가짐과 함께 포착되면서 우리는 한 가정과 가족이 어떻게 형성되고 구축되면서 그들만의 사적 세계의 다소는 완고하고 다소는 배타적인 영역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를 보게 된다. 그렇다면 수많은 가족, 가정은 결코 단일하거나 똑같은 식으로 만들어지거나 형성되는 것만은 아니다. 이질적인 공간과 그 공간에서 자신들의 삶의 문화와 질을 나름대로 차별화시켜가는 이들의 초상이 결국 김옥선이 찍은 가족사진인 셈이다. 그러나 한 가족이 구축되고 조직되는 이데올로기, 공간의 편성과 인테리어, 훈육과 도덕과 윤리가 이루어지는 디테일한 흔적이 좀 더 세심하게 포착될 수 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 편이다. 전미숙의 가정은 잡다한 우리네 살림살이의 그 누추하고 비근한 소도구들, 장식들만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물들의 표면이 안착된 인화지에는 단조로운 한 가정의 살림살이의 목록만이 들러붙어 있지는 않아 보인다. 그리고 그 가정이란 공간은 두 작가의 시선에 의해 포착된 도시화된 가정공간이 아니라 도시의 언저리, 주변부에 위치한 덜 세련되고 다소 낙후된 농촌의 집안 풍경 혹은 다소의 가난과 남루함, 빈곤이 스물거리는 공간이다. 그 집안에 놓여지고 걸려있는 자잘한 생활용품들, 인테리어는 분명 우리들의 지난 시절의 공간을 느닷없이 환기시켜주는가 하면 급격히 진행되고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간의 진행에 뒤쳐진 복고와 노스텔지어를 물씬 풍겨주는 공간의 표정들이기도 하다. 유행과 패션, 취향의 차이에 따른 가정의 문화는 결국 시간이 지배한다. 그래서 그곳에는 전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전통과 현대의 현기증 나는 교차와 변모 변질의 시간을 체험해온 한국의 근. 현대화의 표정이 적나라하게 엉켜 있다. 이렇게 한 가정의 풍경은 한 사회의 모든 것들이 응축되고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새삼 가정공간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할 데이터의 보고로 인식시켜준다. 무수하게 다른 시간적 추이에 걸려든 모든 사물들 속에서 우리들의 삶이 이렇게 진행되고 살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가정문화의 정체에 대해 새삼 사유케한다. 그것이 전미숙의 가정인 셈이다. 이번 ‘리빙룸’전시는 우리에게 가족사진 대신 가정사진에 대해 그리고 가족과 가정에 관해 새삼 사유케 한 흥미로운 전시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 내용과 메시지는 지나치게 일반화되어 있거나 상식적인 내용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편이었다. 사진은 우리가 늘상 보고 있고 보아왔던 것들, 그래서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 한번 낯설게 들여다보게 하거나 반성하게 하는 이미지라면 이 리빙룸은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다소 차분하게 드리운 전시가 되버렸다는 생각은, 어쨌든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