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MIN LEE

취미와 취향의 가족 사회학을 위하여

최봉림 (사진평론가)

가족은 피를 나눈 생물학적 공동체이며, 동일한 거주환경, 음식을 취하며 유사한 획득형질을 공유하는 사회집단이다. 사랑과 혈연으로 맺어져 거의 모든 이해관계를 함께하기 때문에, 어느 집단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태의 유사성을 보이는 사회 구성체이다. 육체의 결합 그리고 피를 매개로 형성된 가족의 사랑은 자아의 보존, 자아의 증식에 관련된 본능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가족은 원초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사회의 구성단위로 여겨진다. 가족 구성원들의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결속력, 가족의 원초적 사랑의 감정, 이선민의 <트윈스>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모녀, 부자 간의 신체적 닮음, 동일한 생활환경에 의한 획득형질의 유사성, 이 근접성에서 비롯된 하나됨의 감정이 <트윈스>의 시발점이었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와 함께 설산에서 모닥불을 지피며, 야영을 하고, 자전거를 차에 싣고 밤이 되면 밤하늘 무수한 별을 함께 바라보고 싶었다. 그렇게 <트윈스>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작가의 사회학적 지성은 친밀한 혈연의식만이 드러나는 가족의 재현에 만족하지 않았다. 한 남자의 아내, 아이들의 어머니인 이선민은 부모와 자식 간의 원초적 사랑, 본능적 애착이 아름다운 자연에서 만나는 낭만을 꿈꿨지만, 작가 이선민은 가족이 공유하는 취미와 취향의 사회학에 경도되었다. 분명 <트윈스>는 가족의 신체적 닮음과 같은 자연스런 동질성 그리고 사랑의 유대감을 보여준다. 그러나 작가는 엄정한 카메라 워크, 포즈의 세심한 조절, 심지어는 의상의 선택에 대한 조언을 통해 엄마와 딸, 아버지와 아들이 후천적 쌍둥이임을 강조한다. 사진심리학자 신수진은 이를 지적한 바 있다. “사진의 등장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온갖 장치들의 유사성은 그들을 후천적인 쌍둥이들로 보이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세심하게 선별된 것이다.” 결국 가정주부 이선민의 가족 사랑에 대한 재현의 욕망을 작가 이선민의 사회학적 통찰이 상당 부분 억누른 셈이었다. 그리고 이 억압은 <트윈스>의 독창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취미와 취향의 가족 사회학을 탄생시켰다.

취미와 취향의 가족 사회학을 위하여 작가는 ‘낯설게 하기’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작가는 모델의 ‘자연스런’ 포즈 속에 가족사진의 인위적인 연출과정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포즈의 자연스러움과 친근함을 다소간 파괴하며 연출의 인위성을 부각시켰다. 모델들은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대부분 정면을 응시한다. 모델들은 취미활동의 장소에서 취미에 관련된 전형적인 복장으로 취미의 전형적인 동작을 연기하거나, 그들의/그녀들의 미학적 취향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복장과 생활공간만을 공개한다. 일상의 제스처, 일상의 활동을 멈추고 모델들은 그들의/그녀들의 취미와 취향의 전형성만을 연기하는 것이다. 잡다하고 비근한 일상이 배제된 바로 이 전형성 때문에 관람자들은 모델들의 취미와 취향에서 낯설음을 느낀다. 낯설게 변모한 취미와 취향의 공간 속에서 관람자들은 부모와 자식 간에 존재하는 신체적 유전형질을 인지할 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 존재하는 취미와 취향의 동질성까지 엄정한 사진의 프레임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획득형질을 오늘날 한국 사회의 상황과 관련해 사회학적으로 고찰하게 된다. 또한 작가의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카메라의 시선은 취향과 취미의 대물림에 관련된 사회학적 특성을 공시적으로 탐구하게 만든다. 이렇듯 작가의 ‘낯설게 하기’ 덕분에 관람자들은 그들의/그녀들의 취미와 취향에 동화되지 않고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취향과 취미의 사회학적 의미들을 유추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취향과 취미의 대물림은 가족의 위계질서와 부모의 경제적, 상징적 권력에 의한 일종의 문화적 강요다. 부모들은 나이의 권위와 세속적 교양에서 비롯되는 상징적 권력과 경제적 권력을 통해 여가취미와 미학적 취향을 자식들에게 다소간 강제적으로 훈육한다. 인간은 자신들의 생물학적 용모만을 재생산, 복제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즉 육체적 닮음을 넘어서 자식들에게 사회적 지위의 상속, 취미와 취향의 닮음을 요구한다. 작가의 말을 빌면, 자식이 그녀의/그의 ‘또 다른 자아another self’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식이 그녀의/그의 현재를 상속할 뿐만 아니라, 못다 이룬 꿈, 이상, 욕망까지 성취하기를 고대한다. 자신이 도달한 자리에서 더 멀리 도약하는, 더 높이 나는 분신을 보고자 한다. 자신의 ‘또 다른 자아’가 미완의 자신을 완성시켜 주기를 원한다. 간단히 말해 자식은 부모의 꿈과 욕망의 투사체인 셈이다.

그런데 취미와 취향의 전수는 정치, 경제적 자본의 대물림보다 관리하기가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전수의 메커니즘도 불안정하다. 유증처럼 법제화되어 있지 않으며, 그 전수의 효율성을 계량화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취미와 취향과 같은 문화적 자본은 경제적 자본과 달리 수용자의 특이성, 적성도 전수의 효율성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작가가 5년여에 걸쳐 작업한 <트윈스>는 취향과 취미의 전수에 관련된 어려움을 돌파하는 부모들의 일화이다. 그들의 경제적, 문화적 역량에 맞추어, 가족 구성원들을 문화적으로 통합시키는 에피소드들이다. 가족의 문화적 통합이 그 구성원에게 미치는 여파는 지대하다. 가족의 성씨와 신체 외모에서 확인한 혈연의식을 취향과 취미의 동질성 속에서 다시 확인하면서, 가족의 하나됨을 내면화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가족을 위한 경제적, 사회적 이해관계에 구성원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참여토록 만든다. 그뿐만이 아니다. 물려받은 혹은 함께 나눈 취향과 취미는 가족이 처한 현재의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확대, 재생산하려는 가치관을 심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현재의 생활조건에 만족하는 가치관을 수립하기도 한다. <트윈스>의 모든 장면은 이 둘 중 하나의 가치관을 생성하는 과정의 특정 순간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그녀의 자식에게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복제 혹은 갱신하도록 유도하며, 그에 걸맞는 여가취미, 미학적 취향까지 승계토록 자극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경제적 자본이다. 그러나 작가는 취미와 취향의 형성에 미치는 경제적 자본의 역할을 축소시켰다. <트윈스>의 캡션은 모델들의 사회적 지위를 가늠케 하는 직업, 경제 수준을 예상케 하는 거주지를 표기하지 않고, 오직 모델의 이름만을 기입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분명 미학적 취향과 여가 취미를 가족 간의 사랑의 행위로 간주하고 싶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윈스>는 경제적 자본과 상징적 권력에 연결된 가족 취향과 취미의 사회학을 객관성, 구체성이라는 사진 매체의 특성을 십분 활용해 어느 사회학자보다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트윈스>는 여가활동을 순수한 가족 사랑의 표현,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으로 보려는 이선민의 의도를 일정 부분 배반하면서, 그것이 가정의 경제적 조건과 부모의 상징적 권력의 결과임을 치밀한 사진 언어로 공개한다. 작가는 언제나 엄정한 카메라 워크, 치밀한 조명 테크닉을 동원하면서, 취미와 취향에 숨겨져 있는 사회학적 의미를 선명하게 노정하고야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