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르지오 데 키리코의 유언이경민 (사진비평가)그가 권력의 문제를 들고 나섰다. 그것은 무척이나 직설적인 듯 했고, 사실 그렇다. 그렇기에 우선 무거운 마음으로 그 이미지에 마주서게 된다. 그 이미지가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권력의 문제를 묻고 있는가를 찾기 위해서 나는 무거움을 지탱하며 그 이미지 앞에 서 있다. 그리고 나서 보이는 것은, 역시 직설적인만큼 권력적 상징의 ‘오브제들이 곳곳에서 나를 불러 달라며 손을 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권력을 대표하는 제왕의 상징들이 온갖 소품들로써 무대 위의 모델들에게 걸쳐져 있다. 의상이며, 월계관과 반지, 그리고 그 모델이 취하고 있는 전형적 포즈까지도. 그래 나는 사진가가 말하고 있는 것을 잘 찾고 있어. 그건 <스포츠 서울>의 숨은 그림 찾기 보다 더 쉽잖아! 어, 그런데 저 뒤에 그림들은 또 뭐지? 벌거숭이 임금님에 대해 잘 알지? 그는 참 슬픈 왕이었어. 그에게는 왕으로의 권위나 그에 걸맞는 카리스마가 부족했어. 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는 백성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의상에 대해 누구보다 앞서가는 심미안을 떨쳐 보이고 싶었던 거지. 그게 그의 잘못이었겠어? 그를 왕이게끔 작용시킨,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희생당했을 뿐이야!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힘을 재현체계라고 부른다. 그것은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벗어나서 결코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을 언술이라고 해도 좋고, 지식이라고 해도 좋다. 이름이야 어떻든 그것은 항상 권력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1) 회화에선 인간이 권력(신으로부터 쟁취한)의 맛을 알기 시작한 15세기에 원근법이란 이름을 달고 탄생했다. 원근법은 피라밋의 구조를 갖고 있으며, 그 정점에는 신을 대신한 인간(회화)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이후로 회화에선 계급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높은 지위와 부를 획득한 특정한 군상들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그러한 모습들은 권력과 일정하게 맞닿아 있었다. 이선민은 그러한 모습들을 알레고리화 시켜 사진이라는 통로로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쯤 와서 다시 그의 사진으로, 특히 그 사진 속의 배경으로 사용된 ‘데 키리코’의 그림으로 되돌아보자.(그림과 도판 참조) 우선 세트의 바닥 구조를 살펴보면 모든 수직선들이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들어가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3차원적 구조를 2차원의 평면에 압축하여 하나의 일루전을 일으키기 위한 회화에서의 기본 도구인 선원근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데 기리코는 함정을 파 놓고 우리로 하여금 시각적 오류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루돌프 아른하임은 자신의 저서인 <미술과 시지각>에서 데 키리코의 원근법의 수정이 가져오는 시지각적 효과를 살펴보고 있는데, ‘언듯 보기에 견고해 보이는 장면은 원근법의 수정에 의한 숱한 모순들로 인해 낯익은 듯 하면서도 비실재적인 세계로 창조되고, 우리가 바라보는 장소나 다른 사물들을 판단하는 기초가 되는 대상에 따라서 형상을 이리저리 변화시킨다’ 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데 키리코의 전통적 원근법에 대한 반역은 ‘재현을 통해 세계를 이해할 수 있으며, 인간의 사유 체계를 반영할 수 있다’는 서구인들의 전통적 믿음에 대한 자기반성적 행위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성은 기본적으로 “유럽 문명에 있어서 예술의 기본 성격을 구성하는 요소는 대상(사물)에 대한 ’소유 욕망‘이며, 그것은 ‘바라보는 방식’과 일정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레비 스트로스의 지적에서 비롯한다고 할 수 있다. 바라보는 방식의 하나인 원근법은 이러한 ‘시각적 소유욕’을 그림 속에 구체화 시키는 대표적인 재현 체계인 것이다. 이선민의 사진에는 원근법이 갖는 이러한 권력적 의미와 데 키리코의 원근법의 수정이 갖는 의미가 동시에 존재하며, 이와 같은 이중 구조가 그의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권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편 여기서 그가 사용한 알레고리는 이러한 무거운 주제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유용한 수사법으로 ‘추상적인 개념이나 사상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무엇인가 비유적 형상에 의하여 구체화하는 표현법’을 말한다. 사진에 있어서 알레고리의 사용은 19세기 중엽에 ‘우의적 사진’ 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당시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즉 국가 이념과 도덕관이 구현되도록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오늘날에 되살아난 알레고리 수법은 재현체계가 갖는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그 내부로부터 해체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역기서 우리는 ‘관습화된 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제공한 ‘숨은 그림 찾기’에 참여하여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새롭게 보는 방식의 유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재현의 대상들이 바뀌어 가고 있다. 이선민의 사진에서 보이는 그러한 직설적인 권력들이 상징적 권력의 모습으로 은폐된 채 우리들 곳곳에 나타난다. 그 가운데 가장 흔하게 마치 공기처럼 느껴지는, 그래서 쉽게 잊고 마는 것이 상업 시스템이다. 이러한 시스템이 갖는 이데올로기를 알면서도 속아주는 또는 그 속에서 유희하는 우리들의 일상적 상황은 그러한 권력적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한다. 꿈과 환상, 동심 등 우리의 유일한 경험 세계를 저당잡힌 채, 갖가지 재현체계들에 의해 우리의 삶은 길들여져 간다. 빔 밴더스 감독의 영화 <이 세상 끝까지 until the end of the world>(1991)는 가상현실로 재현할 수 없는 ‘추억’과도 같은 기억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며, 그러한 기억들이 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하는 유일한 증표임을 역설하고 있다. 그의 메시지는 우리의 미래에 던지는 일종의 ‘아포칼립스 apocalypse’이기도 하다. 실재와 가상(재현)이 같아진다면3), 그리고 그것들이 주는 효과가 같다면 인간이라는 근본적 존재 가치는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아무리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재현체계 속에서도 항상 벌거숭이 임금님일 수 밖에 없다. 권력이란 그것을 쥐고 있는 사람의 것이기보다는 항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자를 조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이야기되고 있는 포스트모던 이론 또는 그 철학은 이러한 재현체계 그리고 그 체계를 움직이게 하는 숨은 권력을 밝히려는 일련의 노력들이다.(그래서 재현의 문제, 표상성의 문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르는 주된 이슈가 되었다) 이선민은 사진이라는 시각 매체를 다루고 있으므로 권력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어떻게 사진 속에 담아 시각화 시킬 것인가가 그의 작업의 핵심이다. 여기서 그는 피상적으로 흐를 수 있는 권력의 문제를 ‘원근법이라는 시각적 권력 상징’ (이것은 모델이 입고 있는 의상이 될 수 있고 그 모델들의 포즈가 될 수 있다)을 이용하여 알레고리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가 노리는 것은 권력 그 자체의 해체가 아니라 그 모순구조의 드러냄이다. 그것은 재현 체계를 통해서만 그 구조를 파헤칠 수 있고 우리는 그 체계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은폐된 것들을 드러내는 반복된 과정을 통해 ‘올바른’ 권력의 행사가 이루어 질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인간이 추구하는 진정한 합리화에 보다 가깝게 다가서게 될 것이다. .......... 사진이 갖는 정치학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1) 여기서 ‘재현 representation’에 대해 살펴보고 넘어가자. 이
카탈로그에는 이선민의 주소가 써 있는데, 그 주소는 그가 살고 있는
어떤 실제적 장소를 가리킨다. 이처럼 ‘실재’를 대신한 지시어(문자,
숫자 또는 도표 등의 기호들)가 실재처럼 의미하고 작용하는 것을
재현/표상이라고 얘기한다. 15세기 이후의 서양 미술은 원근법이라는
재현체계를 이용해서 다양한(은폐적인 또는 도덕적 규범과 같은
구체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상화 시켜왔다. |